최씨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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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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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씨유래
최씨는 우리나라 성씨 가운데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씨족의 하나로서 역사상 수많은 인재을 배출한 전통 있는 명문거족으로 오랜 역사의 흐름과 체험속에서 많은 특성을 남겼으며, 역사상 선현들이 이룩해 놓은 찬란한 업적에서 더듬어 볼 수 있는 최씨 특유의 기개 · 강기 · 신념 · 절조 등이 있다.
최씨의 원조는 신라 건국의 전신인 사로(斯盧 : 서라벌)의 육촌중의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사량부(沙粱部) 촌장 소벌도리(蘇伐道利)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57년경 조선(朝鮮)의 유민(遺民)들이 여러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 신라 3대 유리왕 9년(서기 32년) 봄에 6부를 개정하고

돌산고허촌장(突山高墟村長 : 沙梁部) 소벌도리(蘇伐道利)에게는 최씨(崔氏),
알천양산촌장(閼川楊山村長 : 梁部) 알평(謁平)에게는 이씨(李氏),
무산대수촌장(戊山大樹村長 : 漸梁部) 구례마(俱禮馬)에게는 손씨(孫氏),
취산진지촌장(嘴山珍支村長 : 本彼部) 지백호(智伯虎)에게는 정씨(鄭氏,)
금산가리촌장(金山加利村長 : 漢祇部) 기타(祇陀)에게는 배씨(裵氏),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長 : 習比部) 호진(虎珍)에게는 설씨(薛氏)

위와 같이 성(姓)을 내려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위의 6부 촌장들이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 기록(記錄)하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최씨는 387본(本)까지 기록하고 있는데 거의가 지명이고 실제 시조가 분명하게 확인된 것은 43본이다. 경주최씨상계세보의 기록으로는 최치원 선생의 윗대에서 분파된 본관(本貫)으로 개성(開城) · 삭녕(朔寧) · 동주(東州 : 철원) · 전주(全州 : 군옥파)가 있으며, 최치원 선생의 후대(後代)에서는 함양(咸陽) · 청주(淸州) · 영흥(永興) · 충주(忠州) · 용강(龍崗) · 수원(水原) · 부안(扶安) · 강릉(江陵) · 강화(江華) · 화순(和順) · 통천(通川) · 양천(陽川) · 원주(原州) · 해주(海州) · 진주(晉州) · 탐진(耽津) · 전주(全州 : 순작, 균)가 분파(分派)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 경주최씨(慶州崔氏) 유래(由來)
경주최씨(慶州崔氏)는 우리나라 최씨가운데 대종(大宗)으로 신라(新羅) 사량부(沙梁部) 촌장 소벌도리(蘇伐道利)를 원조(元祖)로 하고 있으며, 신라(新羅) 말기의 대문장가(大文章家)인 문창후(文昌侯)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을 시조(始祖)로 하여 본관(本貫)을 경주(慶州)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는데, 다른 최씨(崔氏)들도 최치원 선생의 선대(先代) 및 후대(後代)에서 분파(分派)되었다고 보면 정확(正確)하다. 이렇게 신라(新羅)시대에 웅기(雄起)한 최씨는 신라에서 최치원(崔致遠) · 최승우(崔承祐) · 최언위(崔彦撝)등 세 사람이 함께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과거(科擧)에 급제하고, 그 명성을 날림으로써 1대 3최(一代三崔)라 불리었다. 특히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 선생과 같은 대문장가(大文章家)는 우리나라는 물론 동양(東洋)의 어느 역사 속에서도 그 유래 (由來)를 찾아보기 힘든 명현(名賢)으로 그가 남긴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은 동양최고(東洋最高)의 지성(至聖) 이고 한문학(漢文學)의 조종(祖宗)으로 추앙(追仰)받고 있으며, 최씨는 고려 때 와서는 역사상 최고(最高)의 번영을 누렸다.

● 고려시대(高麗時代) 최씨(崔氏)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수많은 최씨(崔氏)들이 고려 역사를 수(繡) 놓았다. 서기 1196년(명종 26)~1258년(고종 45)까지 60여 년 간 군벌정치로 한때 최씨왕국(崔氏王國)을 방불케 했다. 충절(忠節)의 명장(名將) 최영(崔瑩)은 수많은 국내외(國內外) 침입과 반란이 있을 때마다 격퇴, 평정하여 고려의 시련을 극복하고 나라에 공헌(貢獻) 했으며, 죽음에 임했어도 끝까지 두 임금을 섬기지[不事二君] 않겠다는 충절은 우리 민족(民族)의 얼이요, 최씨 특성(特性)이다. 그 외 고려 때 문신(文臣) 최유청(崔惟淸) · 최윤의(崔允儀) · 최유엄(崔有) · 최재(崔宰) · 최항(崔沆) · 최충(崔沖)등이 유명했으며, 무신(武臣)으로는 최충헌(崔忠獻)이 있다.

● 조선시대(朝鮮時代) 최씨(崔氏)
조선(朝鮮)때 와서 명신(名臣) 최명길(崔鳴吉), 양명학(陽明學)의 대가 최석정(崔錫鼎), 학자(學者) 최수성(崔壽城), 문신 최응현(崔應賢), 최항(崔恒), 최만리(崔萬理), 조선 후기 때, 최익현(崔益鉉), 동학(東學)의 창시자 최제우(崔濟愚), 신문학 운동과 국학의 개척자 최남선(崔南善), 항일투사 최재형(崔在亨), 동학의 제2교주 최시형(崔時亨)등 많은 최씨들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국가에 공헌했다. 조선시대 와서는 한 씨족(氏族)의 가문(家門)을 가늠하는데는 흔히 문과(文科) 급제자 수를 따지고 명문의 척도를 정치적 세력의 성장과 관련시키는 관료적인 사회(社會)였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당시 과거제도가 권세가의 농락을 받은 일이 특히 많다보니 많아 견식(見識)과 인격(人格)을 겸비하고 불의(不義)와 타협하지 않는 최씨들에게는 벼슬이 그다지 중요시 되지 않았다. 그래서 신라와 고려시대에서 명성(名聲)을 날렸던 최씨가 조선(朝鮮)때 와서 의외로 벼슬에 나가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경주 교동에 자리한 최부자(崔富者)는 12대(代) 동안 만석(萬石)군으로 살아 왔지만 벼슬은 9대(代) 진사(進士)만 한 집안으로 로 유명하다. 그리고 조선(朝鮮)때 명종(明宗), 선조(宣祖), 인조(仁祖) 임금은 “선현(先賢)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선생은 우리 동방의 이학시조(理學始祖)이니 그의 자손은 귀천이나 적서(嫡庶)를 막론하고 비록 먼 시골에 사는 사람까지라도 대대로 군역(軍役)에 동원하지 마라”고 전교(傳敎) 하였으며, 정종(定宗)은 “태강(汰講 : 서원에서 도퇴 시킴. 즉파면)의 예(例)에 넣지 말고 범하는 수령은 처벌하라”고 전교 하였다. 이렇게 신라(新羅)에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국난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최씨(崔氏)들이 등장하여 나라에 공헌하였으며 구국(求國)의 대열에 앞장섰던 항일투사와 의병(義兵) 및 근대사회 발전에 공헌한 많은 최씨(崔氏)들의 거룩한 발자취는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명문(名門)인 최씨 가문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범 최씨들은 현재 우리나라 전국 지역에 분포되어 살고 있으며, 현재 통계로 230여만 명으로 집계 되어 우리나라 성씨중 김(金), 이(李), 박(朴)씨 최(崔)로 4번째로 많은 성씨(姓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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