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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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최치원

● 문창후(文昌侯)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始祖 崔致遠 先生 肖像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始祖) 문창후(文昌侯)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은 857년(신라 헌안왕 원년) 신라 서울 경주 사량부(沙梁部)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의 세계(世係)는 너무 오래 전이라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부친(父親)의 이름은 견일(肩逸)이며, 신라 원성왕의 원찰(願刹)인 숭복사(崇福寺)의 창건에 관계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최치원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민(聰敏)하고 학문(學文)을 좋아했으며, 12세의 어린 나이로 배를 타고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10년 안에 학문(學文)의 대가(大家)를 이루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는 아버지의 엄격한 가르침을 받들어 [人百己千, 남이 백을 할 때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 학문에 열중하였다. 

874년(경문왕 14년) 나이 18세 되던 해 과거에 한번 시험으로 합격한 후, 2년간 낙양등지로 돌아다니며 부(賦)와 시(詩)를 짓고 다니다가(작품은 전하지 않고 기록에만 남아 있음),  2년 뒤인 876년 선주(宣州 : 지금의 중국 양주) 율수(溧水)의 현위(縣尉)의 벼슬을 받았고, 이 때부터 최치원 선생은 여러 작품을 썼는데 선생은 작품 활동 뿐 아니라, 관리로도 훌륭하였다. 그러나 더 높은 과거시험이 없음을 알고, 선생은 2년 후, 율수 현위직을 사임하고,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병(高騈)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

  879년(헌강왕 5년) 당(唐)나라 반적(反賊)의 우두머리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道統) 고병(高騈)이 이를 토벌할 때  최치원 선생에게 격황소문(檄黃巢文)을 짓게 하니 반적 황소(黃巢)가 이 격문(檄文)을 읽다가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떨어졌다고 할 만큼 뛰어난 명문(名文)이다. 최치원 선생은 이러한 치적(治積 : 정치적으로 남긴 공적)으로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侍御史內供奉)에 오르고 이어 당나라 황제로 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 금으로 장식되어 허리에 차던 장신)를 하사(下賜) 받았다. 고병의 종사관으로 있으면서 표(表)⋅장(狀)⋅서계(書啓)⋅격문(檄文) 등을 제작하는 일을 맡게 되어 공사간에 지은 글이 만 여수에 달했다고 하며, 신라에 귀국하여 이글들을 정선하여 그 유명한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을 지어 헌강왕에게 바쳤다. 

최치원 선생은 당나라에 벼슬에 있으면서도 기울어가는 고국(신라)을 구하고 부모님을 뵙고 싶은 애틋한 마음을 시(詩)로 달래며, 공무 중 여가를 이용해 다섯 권의 <중산복궤집(中山覆集)>을 엮어 훗날 고국의 왕에게 올렸다. 선생이 고국을 그리며 읊은 시(詩)는 다음과 같다.

窓外三苦雨(창외삼고우) 창 밖에는 밤이 깊도록 비가 내리고
燈前萬里心(등전만리심) 등불 아래 마음은 고국을 달리네.
秋風惟苦吟(추풍유고음) 가을바람에 시를 읊네.
세로소지음(세로소지음) 세상에 내 마음을 아는 이 없네.

884년(헌강왕 10년) 나이 28세 때 최치원 선생의 귀국할 뜻을 당(唐)나라 희종(僖宗)이 알고 사신(使臣)에 임명하여 조서(詔書 : 임금의 명령을 적은 문서)를 가지고 귀국하게 했다. 885년(헌강왕11) 신라로 돌아온 최치원 선생은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지서서감(知瑞書監)등 여러 벼슬을 받았으나,  이때 조정(朝廷)의 기강(紀綱)이 어지러움으로 스스로  외직(外職)을 자청하여 태산(현 : 정읍) 및 부성(현 : 서산)의 태수가 되었다.

894년(진성여왕 8년) 나라는 계속 혼란하고 백성들이 도탄에 허덕이므로 최치원 선생은 왕에게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 : 국정개혁 수습책)를 상소(上疏)하여 아찬(阿 : 신라 17관등 중 여섯째 벼슬)의 벼슬까지 받았으나, 국정은 날로 어지러워지고 여러번에 걸쳐 상소한 국책론(國策論)이 시행되지 않자 나라의 위태로운 형세를 개탄(慨嘆)하며 “계림은 누른 잎과 같고(鶴林黃葉) 송도는 푸른 소나무와 같다.(告鳥 嶺靑松)”는 놀라운 글을 상서(上書)하였으니 훗날 신라 사람들은 선생의 감식지명(鑑識之明)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진성여왕과 그 뒤를 이어 새로이 즉위한 효공왕을 위하여 각 각 대리 작성한 상표문(上表文)에서 신라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을 윗글에서 박진감 나게 묘사하였다. 당나라에서 직접 황소의 반란 등을 체험한 바 있는 최치원 선생은 고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재난이 당나라에서 연장 파급되어 지는 것을 느꼈던 모양으로 그 당시 제일의 국제통(國際通) 다운 시대감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최치원 선생은 신라 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느낀 나머지 다시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산림과 강 해변(江海邊)을 거닐면서 정자(亭子)를 짓고, 송죽(松竹)을 벗삼아 풍월(風月)에 심취하며 즐겨 찾았다고 하는 데, 주로 찾은 곳들은  경주 남산,  강주(剛州, 지금의 의성)의 빙산(氷山), 합천(陜川)의 청량사(淸寺), 지리산의 쌍계사(雙磎寺), 합포현(合浦縣, 현 창원)의 별서(別墅)등과 이밖에도 동래의 해운대(海雲臺)를 비롯하여 선생의 발차취가 머물렀다고 전하는 곳이 여러 곳 있다. 당시의 사회적 실현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의 사이에서 빚어지는 심각한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은퇴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마침내 진성여왕 재위 11년에 인책선양으로 조카인 효공왕에게 양위를 하자 최치원 선생은 드디어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 선생이 가야산에 들어가신 나이를 보면 동유록(東儒錄)에 의하면 896년(나이 40-42세)가 되고, 동국문묘(東國文廟) 18현(賢) 년보(年譜)에 의하면 서기 898년(나이 42세)까지 재직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만년에 모형(母兄)인 僧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갔지만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길이 없다.

※ 더 자세한 내용은 최치원의 <글로 보는 일대기), 표로 보는 일대기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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