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파설명
● 화숙공파(和淑公派, 9世孫 崔玄祐)
화숙공(和淑公) 현우(諱 玄祐)는 중시조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신 최애(崔藹)의 두 아들(현우ㆍ광우)중 첫째 아들로 고려 충숙왕, 충혜왕 때 인물로서 고려 충숙왕 때 서해도안렴사를 역임하시고 和淑公으로 贈諡되었다. 광정대부에 증직, 삼사좌사 등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명망이 두터웠으며, 벼슬이 門下侍中에 이르러 慶州崔氏 家門을 더욱 빛냈다. 배위는 청주경씨로 밀직사 사만의 여식으로 조부는 판통례문사수, 증조는 호부상서 번이고 외조는 창성경공 해이다.
슬하에 3남 4녀로 1남→ 최습(濕), 2남→ 최잉(陾), 3남→ 최주(周), 1녀→ 사위 이초, 2녀→ 사위 오식, 3녀→ 사위 나현, 4녀→ 사위 기원이며 사위 기원은 행주기씨(幸州寄氏)로 벼슬은 찬성사(贊成事)로 덕양군(德陽君)이다.
◊ 묘소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 산 31번지 쌍분이다.
◊ 시제 : 음력 10월 1일
① 석계공파(石溪公派) 최첨노(添老)
12세손으로 석계공 최첨노(崔添老)는 화숙공의 증손자이며, 11세손인 계운(繼雲)의 1남 2녀 중, 외아들로 내사령을 지냈으며, 공민왕 말년 온수감무로 있던 종제인 최이(崔邇, 號 遯翁)와 더불어 관직을 버리고 송경(松京, 지금의 개성) 남문 밖에 은신하였다가 급기야 망국에 이르자 종형제인 둔옹공(遯翁公)과 함께 강원도 인제에 있는 한계산의 심간유곡에 초옥을 짓고 세정에 관여하지 않고 수영풍월로 세상을 탄하시다. 정종과 태종이 여러 번 불렀으나, 끝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節義)를 굽히지 아니하니 조정에서도 이에 감복하여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오도총도총관을 그리고 종제인 둔옹공에게는 자헌대부 한성판윤 겸 오위도총부총관의 증직을 내려 그 절의를 높이 칭송하였다. 후에 두문동(杜門洞) 72현에 배향되었다.
슬하에 3남 1녀로 1남→ 문손(文孫, 문과급제, 大司憲), 2남→ 효손(孝孫, 문과급제), 3남→ 순손(順孫), 1녀→ 사위 이우생(李遇生, 경주이씨)이다.
◊ 묘소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동국로245번길 118-3(성석동)
◊ 시제 : 음력 10월 1일
② 참의공파(參議公派) 최유온(有溫)
13세손으로 참의공파 최유온(崔有溫)은 온수감무를 지내신 12세손 둔옹공(遯翁公) 최이(崔邇)의 4남 5녀 중 장남으로 판전의시사를 지내고 통훈대부를 받고 군수를 역임하였다. 둔옹공의 종형인 최첨노(崔添老)와 함께 두문동(杜門洞) 72현의 반열에 올랐으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節義)를 끝가지 지킨 분이다. 후에 통정대부, 이조참의와 홍문관 부제학에 중직되었으며, 슬하에 외아들 최윤옥(崔潤玉), 무과급제)을 두었다.
◊ 묘소 : 경기도 포천시 기지리 선산에 설단으로 모셔져 있다.
◊ 시제 : 음력 10월 12일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호국로 2254번길 61-10
③ 충재공파(盅齋公派) 최숙생(淑生)
16세손으로 12세손인 둔옹공(遯翁公) 최이(崔邇)의 현손으로 부는 철중(鐵重)이고, 최저(渚), 증조(曾祖)는 참의공 유온(有溫)의 동생 유량(有良)이다. 호(號)는 충재이고, 성균관 진사를 거쳐 성종(성종 2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시고 예문관검영 의정부사인 홍문관수찬, 사헌부지평, 사간원헌남, 홍문관 직제학 등을 역임하였으나 갑자사화 때 폐비 윤시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사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중정반정으로 복직되었다.
중종 3년 문신정시에 장원하고 승지, 대사성, 충청도 관찰사, 대사간, 우찬성, 좌찬성 등을 역임하였으나 기묘사화 때 조광조 일파라하여 파직되었는데,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정공 시호가 내려졌다. 슬하에 외아들 최경홍(景弘)을 두었다. 최경홍은 1528년 식년시(式年試) 문과 병과에 급제하였다.
◊ 묘소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동국로245번길 118-3(성석동)
◊ 시제 : 음력 10월 1일
④ 참판공파(參判公派) 최유공(有恭)
13세손으로 12세손인 둔옹공(遯翁公) 최이(邇)의 4남 5녀중 3남으로 사직(司直)을 지냈으며, 참판으로 추중(追贈)되었다. 슬하에 6남을 두었다 1남→ 인손(仁孫), 2남→ 창손(昌孫), 3남→ 예손(禮孫), 4남→ 형손(亨孫), 5남→ 정손(貞孫), 6남→ 이손(利孫)이다. 특히 4남→ 현손(亨孫)의 2남은 한홍(漢洪)은 육두병사관지현감중추부사로 계림군에 봉해졌다.
◊ 묘소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동국로245번길 118-3(성석동)
◊ 시제 : 음력 10월 1일
⑤ 금위공파(禁衛公派) 최유검(有儉)
13세손으로 12세손인 둔옹공(遯翁公) 최이(邇)의 4남 5녀 중, 4남으로 내금위(內禁衛)를 지냈다. 슬하에 2남으로 1남→구손(龜孫), 3남→인손(麟孫)이다.
◊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동국로245번길 118-3(성석동)
◊ 시제는 음력 10월 1일
⑥ 상서공파(尙書公派) 최이(邇)
10세손으로 화숙공 현우의 3남 4녀 중 둘째 아들로 고려 때, 광록대부를 받고, 형부상서를 역임하였다. 슬하에 3남 6녀로 1남→ 방준(方濬), 2남→ 안준(安濬), 3남→ 원준(元濬), 1녀→ 사위 유순(柳順, 문화유씨), 2녀→ 사위 이거이(李居易, 청주이씨, 영의정, 태종 이방원의 누나 경신공주와 이방원의 딸 정순공주가 이거이의 두 아들과 혼인), 3녀→ 사위 이신(李伸, 경주이씨), 4녀→ 사위 한원귀(韓原貴, 천주한시), 5녀→ 사위 박인양(朴寅亮, 울산박씨), 6녀→ 사위 이정(李程)이다.
◊ 묘소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종국로245번길 118-3(성석동)
◊ 시제 : 음력 10월 1일
⑦ 판전의시사공파(判典儀寺事公派) 최주(周)
10세손 화숙공(和淑公)의 3남 4녀 중 막내아들로 고려 때 정순대부를 받고 판전의시사를 역임하였다. 슬하에 2남으로 1남→ 상염(尙濂), 2남→ 상경(尙濂)이다.
◊ 묘소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동국로245번길 118-3(성석동)
◊ 시제 : 음력 10월 1일
⑧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 최청(淸)
12세손으로 화숙공의 증손이다. 아버지는 경운(慶雲)이다. 공의 휘는 청(淸)이요 자는 직재(直哉)이며 號는 觀稼亭이다. 조선조 甲戌(1394)년 좌찬성(左贊成)에 제수하고 수차 불렀으나 입조하지 않으니 이태조가 친히 세 차례나 찾아 왔으나 끝내 굴복(屈伏)하지 않고 문을 잠근 채 말이 없으니 이태조는 더 이상 찾지 않았다. 고려 충혜왕(忠惠王) 甲申(1344)년에 탄생, 조선조 태종 甲午년(1414) 9월 28일 71세로 卒하시니 양주 풍양 독정 요곡 축좌지원에 모셨다.
배위는 경주 李씨이니 좌의정(左議政) 정순공(靖順公) 성중(誠中)의 따님이오. 경서와 역사를 두루 잃어 여사풍이었으며, 공민왕 丙戌년(1346)출생하시고 태종 乙丑(1409)년 4월 27일 64세에 卒하시니 공의 묘지에 부장하였다.
◊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 하독정
◊ 시제 : 음력 10월 6일
◆ 참고문헌 : 觀稼亭公 휘청(諱淸)의 유래(由來)
전래의 구보에 의하면 觀稼亭公(諱:淸)은 9세손 和淑公(諱:玄祐, 門下侍中)의 증손이다. 이러한 사실이 분명한 것은 英祖(영조10) 갑인(甲寅 1734年) 始譜를 시작으로 정유보(丁酉譜 1777年), 갑인보(甲寅譜 1854年), 임오보(壬午譜 1882年), 갑진보(甲辰譜 1904年), 무진보(戊辰譜 1928年), 계묘보(癸卯譜 1963年), 신유보(辛酉譜 1981年), 임오보(壬午譜 2002年)등 累譜의 上係가 一目瞭然하게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和淑公派에 入譜되어 있는 觀稼亭公(淸) 後孫은 正統性을 이어온 家門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를 立證할 수 있는 자료를 보면 觀稼亭公(淸)의 妻家인 慶州李氏 族譜(外堂族譜)를 보면 誠中女, 崔淸, 父에 좌윤 慶雲이라 하였고, 또한 觀稼亭公의 딸이 出家한 江陵 金氏의 族譜를 보아도 父에 崔淸, 祖父에 慶雲으로 등재되어 있으니, 누가 보아도 觀稼亭公은 和淑公(諱 玄祐) 할아버지의 증손임이 분명한 것을 알 수 있다. 現在 和淑公派 내에 있는 觀稼亭公派는 繼代가 正確하고 累代에 걸쳐 入譜하였으므로 앞으로도 변함없이 繼承될 것이다. 그렀다면 다른 觀稼亭公派는 어떻게 형성되었나? 이조 헌종(1853년) 을미년(乙未年)에 고려의 대명신인 淸河候 崔承老의 後孫인 潤柱, 極柱가 傳來의 族譜를 무시하고 失傳된 代數를 任意로 操作하여 史記에 分明한 文昌候 5世孫 善之公 대신 최은함(崔殷含), 최승노(崔承老), 최숙(崔肅), 최제안(崔齊顔), 최계훈(崔繼勳) 공을 繼代하여 僞譜가 시작되었다. 당시에 서신내용을 보면 和淑公派 종중원들께서 잘못된 위보를 수거하여 훼철(毁撤)도 하였으나, 이미 분질된 족보가 경향각지에 퍼져 그 위보를 상계로 한 觀稼亭公派의 족보가 현재 수많은 후손들이 잘못된 족보에 입보하여 世系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和淑公派와 최은함, 최승노, 최숙, 최제안, 최계훈을 선대로 한 觀稼亭派와의 갈등은 계속 되고 있는 실정이며, 현재 우리나라 사학자(史學者)들도 고운 선생의 아들, 손자, 증손자는 실손된 사실로 보고있으며, 5세손 선지(善之)는 고려사에 현손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우리 후손들은 오로지 정사(正史)에 따르는 것이 정도(正道)라 사료되어 諱 善之는 대동보에 5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다.